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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Isaa
채건석 교수 2010-05-22 추천 2 댓글 0 조회 986

1QIsaa

- 채건석 교수-

 

1QIsaa는 여러 사해사본들 중에서 이사야 사본임을 나타내는 학술적으로 약속된 표기이다.(*맨 끝의 a는 앞 글자 a보다 크기를 작게하고 앞에 있는 a보다 높은 위치에 쓴다.) 여기에 쓴 글씨체를 scriptio plena 즉 “완전서법”이라고 하는데 이 필체를 일컬어 하스몬/하스모네아 필체라고 한다. 이 글씨는 정4각형을 기본틀로 한 것으로서 이것을 square script-עꔯꙢꗱ בꚔꗖ-‘케타브 메루바’라고 한다.(עꔯꙢꗱ- ‘메루바’에 대해서는 BHS 열왕기상 7:31 תוֹעꔯꙢꗱ-‘메루바오트’-‘네모졌더라’를 참조할 것.)

B.C.150-125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1QIsaa는 1947년 사해 서북부 쿰란지역 제1동굴에서 발견 되었다. 얇은 가죽으로 되어있고 양피지가 아니다. 가죽조각 17개를 꿰매 이은 것으로 두루마리 형태로 발견되었다. 소멸된 부분이 조금 있다. 그것이 마모에 의한 것인지 풍화작용에 의한 것인지 부패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낡게 되는 것이 아닌가?

 

길이 7.34m, 높이 26cm, column(段-欄이라고도 지칭한다.)은 모두 54개의 column으로 각 段 본문 한 줄의 길이는 대략 12cm, 29 줄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 본문 모두가 쓰여진 사본이다. 1장부터 33장까지와 34장부터 66장까지는 각각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사야 66장을 절반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사람이 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부자가 둘이서 썼을까? 형제가 둘이서 썼을까? 친구가 둘이서 썼을까?

 

나는 1QIsaa를 보면 볼수록 인간적인 체취를 강하게 느낀다.

실수로 빠뜨린 글자를 행간에 다른 글자보다 작은 글자 크기로 써 넣고 있는 그 사람을 상상해 보라!

 

이런 예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예를 들면 4Q175(4QTestimonia-증언집)의

11행과 12행의 사이, 16행과 17행의 사이, 18행과 19행의 사이, 22행과 23행의 사이에 작은 글씨를 써 넣었는데 이런 것을 볼 때 나는 무척이나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낀다. 그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가죽에 다시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짐승을 사냥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가죽을 손질하는 까다롭고 번거로운 과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가죽은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값나가는 물건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가죽을 가져왔고 서기관은 다만 그 가죽에 글씨를 써 주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또 행간에 추가해서 더 써 넣는 것이 관례적으로 용납되고 있었을 것이다. 4Q175(4QTestimonia-증언집)가 흥미로운 것은 그 글씨체가 1QIsaa와 같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글씨는 매우 활달하고 유려하고 속필이며 자유자재 능숙한 솜씨를 보이며 휘갈겨 쓴 느낌이다.

 

여러 사본들을 대조해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글씨를 어떤 순서로 쓰는지, 어디서 힘을 눌러 쓰는지, 잉크를 찍고 처음으로 쓴 글자인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필기구가 날카로운 것인지 무딘것인지를 알 수 있다.

The Great Isaiah Scroll (1QIsaa) A New Edition Donald W. Parry and Elisha Qimron Leiden ; Boston ; Köln ; Brill, 1998

 

이 책은 1QIsaa를 글자가 흐려져서 육안으로는 식별이 되지 않는 글자들까지 光學器材들을 동원하고 科學的 方法을 이용하여 일일이 판독하고 소멸된 부분까지 연구하여 원 사본의 글자배열과 글자들의 위치를 그대로 따라서 히브리어 현대활자로 찍어낸 책으로서 1QIsaa를 쓸 당시에 필사자가 잘 못 써서 추가로 행간에 써 넣은 작은 크기의 글자까지도 사본에서 보이는 그대로의 크기비율과 위치까지를 재현한 책이다. 매우 독특하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책이다. 유럽에 주문해 산 책이다.

 

현대에 와서도 성경을 필사하는데 현재는 나무를 깎아서 pen으로 사용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식세계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야할까? 그들의 인식은 그냥 나무를 쓰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나무로서의 나무를 의미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짐승의 뼈를 깎아서 사용했다. 물론 갈대도 사용했고 새의 깃털도 사용했다. ‘토라’를 쓸 때는 달팽이 피를 잉크로 사용했다. 달팽이 피는 파랑색인데 생명을 의미한다. 그들의 인식 속에는 생명을 죽여서 낸 피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쓴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의 내면세계에는 생명이 죽어야 생명을 살린다는 인식이 배어있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탐구를 하는 것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지 사람이 창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지금 발견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은 또 꾸준하게 탐구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창조라는 말을 좋아한다.

세상사람들은 창조라는 말의 의미를 착각해서 해석하기를 곧잘 한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지어놓은)해 놓은 것을 사람이 발견하는 것뿐인데 말이다. 이와같은 思惟의 世界는 세상사람들의 價値觀과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價値觀을 다르게 구분 짓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셔야 보인다.

성경에는 눈이 있어도 못 본 사람이 있다.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지 못했다. 자신이 타고 있는 당나귀는 보는데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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